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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IST부설 한국과학영재학교 온라인 과학매거진 코스모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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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제 1호 화학박사, 이태규

우리나라의 화학은 언제부터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을까? 바로 한국의 제 1호 화학 박사인 이태규 박사를 기점으로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태규 박사는 우리나라의 화학을 개척한 선구자로 일제강점기였던 1931년, 많은 차별과 어려움을 극복하고 이태규 박사는 일본에서 이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 뿐 아니라 이태규 박사는 ‘리-아이링 이론(Ree-Eyring Theory)’으로 노벨상 후보에 올랐고, 그 후에는 노벨상 추천위원이 되었다. 그 뿐 아니라 이태규 박사는 1947년에는 대학화학회를 창설하고 초대회장을 맡았고, 서울대학교와 KAIST에서 후진을 양성하기도 하였다. 또한 ‘과학기술부’ 설치안을 제출하 등 우리나라의 화학계를 넘어서 과학계의 발전에 앞장 섰으며, 현대의 과학 시스템의 구축의 큰 기여를 하였다고 봐도 무방하다고 할 수 있다.

이태규, KAIST 명예교수 (1902~1992)

그가 화학에 발을 들이기까지

이태규 박사의 원래 꿈은 소학교의 선생님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경성고등보통학교에서 만난 화학 선생, 호리 선생을 만나며 그의 인생의 전환점을 맞게 되었다. 그는 호리 선생을 만나면서 세계적인 화학자의 꿈을 키워 1920년에는 유학생의 신분으로 일본 히로시마 고등학교에 입학하여 공부를 이어갔다. 그는 다른 여타 학생들보다 더 열심히 공부하고, 노력한 결과 장학금을 받으며 교토대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다. 그 뿐 아니라 그는 그 당시 일본의 최고 화학자라고 불리던 호리바신기찌 교수 밑에서 공부할 수 있는 기회를 잡게 되었다. 이후 열심히 공부하던 이태규 박사는 그의 스승이던 호리바신기찌 교수의 열정적인 지지에 힘입어 식민지의 청년으로서 이례적으로 1931년 일본에서 ‘환원 니켈을 이용한 일산화탄소의 분해’라는 논문을 통해 이학박사 학위를 딸 수 있었다.

이태규 박사의 이학박사 학위 취득관련 보도 자료 (1931년 7월20일자, 동아일보)

이 후 이태규 박사는 이학박사 학위에 만족하지 않고, 더 많은 것을 배우고 식견을 더 넓히기 위해 세계적으로 저명한 석학들이 모여있는 미국의 프린스턴 대학으로 향하게 되었다. 1938년 12월 프린스턴 대학에 방문교수(visiting scientist)로 갔던 그는 그곳에서 이론화학에 대해 공부하던 헨리 아이링(Henry Eyring) 박사를 만나게 되었다.


양자역학을 화학에 처음으로 도입하다 – 아이링 교수와의 인연

이태규 박사는 프린스턴 대학교에서 만난 헨리 아이링 교수와 함께 ‘쌍극자 능률 계산’에 관한 논문을 발표하였고, 이 논문은 화학반응에 양자역학을 도입한 첫 사례로 평가받고 있다. 그 뿐 아니라 이태규 박사는 액체가 흐를 때 경계 부분에 있는 분자들의 움직임에 관한 이론인 ‘수송 현상의 완화 원리’도 헨리 아이링 교수와 같이 발표하였다. 이러한 이태규 박사와 아이링 교수의 논문들은 화학 분야에 양자역학을 도입한 최초의 것으로 화학 분야를 크게 발전시키는 선구자의 역할을 했다. 그 둘은 혁신적이고 도전적인 논문 이후 전쟁을 이유로 일본 대사관 측에서 귀국을 권고했기에 결국 1941년 7월 일본으로 돌아올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아이링 교수와 이태규 박사의 인연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는데, 아이링 교수가 유타 대학으로 옮긴 이후, 이태규 박사도 해방 직후 어지러운 조국의 사정으로 미국, 유타 대학으로 향한 것을 기점으로 둘의 인연은 다시 이어지게 된다. 둘은 다시 만나 1955년 ‘비뉴턴 유동 이론’, 일명 ‘리-아이링 이론(Ree-Eyring Theory)’을 공동으로 발표하여 국제학계에서 크게 주목 받게 되었다. 비뉴턴 유동이론이란 물체의 변형 속도가 외부 작용(stress)에 비례하지 않는 비뉴턴 유동에서 점도(viscosity)의 변화를 이론으로 설명한 것으로 그동안 이론적 접근이 어려웠던 현상을 다루는 일반 공식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큰 의의를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연구 업적은 두 교수의 성을 딴 ‘리-아이링 이론(Ree-Eyring Theory)’으로 불리며 국제학계에서 크게 주목받았다.

또한 이 비뉴턴 유동운동에 대한 유명한 비화에 대해 설명하자면, 이 연구를 진행할 당시 우리나라는 6.25 전쟁이 발발해 이태규 박사 또한 그의 가족들의 생사에 대해 알 수 없는 상황에 놓여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역경은 오히려 그의 연구에 불을 붙여주었는데, 이태규 박사는 고통을 잊기 위해 더욱 연구에 몰입했다. 점심과 저녁은 걸어서 5분 거리인 집에 가서 해결하고 밤에 다시 연구실에 와서 새벽 1시에 퇴근하는 일이 반복됐다. 이렇듯 이태규 박사는 그의 성과에 대해 가족에 대한 걱정과 그리움을 잊으려고 밤낮으로 연구하고 공부하며 매달린 결과라고 전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이태규 박사의 활약

1943년 교수가 된 그에게 일본은 창씨개명을 강요하지 않았고, 그 덕에 그는 그의 고유의 이름을 지킨 채 해방된 1945년 12월 귀국할 수 있었다. 이태규 박사는 귀국한 직후 바로 서울대 이공학부장, 문리대학장을 도맡으며 후학을 양성하기 위해 힘을 썼고, 그 과정에서 그의 후배들을 데려오는데 큰 힘을 썼다. 또한 최상업, 김태봉, 이종진과 같은 사람들을 모아 1946년 6월 지금의 대한화학회의 전신인 조선화학회를 탄생시켜 이태규 박사는 초대와 2대 회장을 역임하였다. 그 뿐 아니라 그는 1946년 3월 미군청에 ‘과학기술부’ 설치안을 제출할 정도로 그의 안목은 시대를 앞서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열악했던 우리나라 화학계의 터를 다지기 위해 노력하였던 이태규 박사는 다양한 정치적 분란과 갈등들을 견디지 못하고 1948년 9월 미국으로 떠나 앞서 말했듯 다시 아이링 교수와의 인연을 이어나가며 국제 학계를 뒤흔들 연구를 하게 된다.

유타 대학에서 제자들을 양성하던 이태규 박사에게 1964년 9월 박정희 전 대통령은 “과학기술 발전은 경제 발전에 필수” 라고 말하며 “과학기술자를 잘 기르려면 이태규 박사 같은 분이 뒷받침해야 한다”며 그에게 에둘러 귀국을 권했다. 이에 이태규 박사는 “조국이 필요하다면 어떤 일도 하겠다”면서 “이 나라에도 희망이 있습니다. 학생들의 탐구욕, 세계 일류 학자가 들려주는 어려운 강연을 끝까지 듣고 이해하려는 그 강인한 탐구욕에 머리가 수그러졌습니다. 조국의 내일은 밝습니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이 만남 9년 후 이태규 박사는 유타 대학의 교수직을 그만두고 1973년 영구 귀국해 1992년 작고할 때까지 현재의 KAIST의 종신 석좌교수로 역임하며, 있으면서 그는 삶을 통해 학문하는 이의 행복과 보람과 가치를 후학들에게 보여주며 후학 양성에 힘썼다. 이에 KAIST 측에서는 KAIST 도서관 입구에 우리나라 과학자로서는 유일하게 이태규 박사의 흉상을 세워 돌아가실 때까지 후학을 위해 힘쓴 이태규 박사를 기리었다.

KAIST 도서관 입구에 세워진 이태규 박사의 흉상

예리한 관찰과 끊임없는 노력 (Keen observation and Everlasting effort)

한 학자로서 어린 이태규 박사를 엄하게 가르친 그의 아버지는 “정신을 한 곳에 집중시키면 무엇이든 못하리!”라는 가훈을 상당히 강조했다고 한다. 이태규 박사는 이러한 부친의 가훈은 “Everlasting Effort”(끊임없는 노력)이라고 번역하고 여기에 과학자로서의 “Keen Observation”(예리한 관찰)을 묶어 자신의 좌우명으로 삼았다. 유타 대학에서 그는 아침 9시에 연구실에 나와 새벽 1시까지 연구에 전념하였으며, 주위의 한국 학생들도 자연히 그의 습관을 따르게 되었다고 한다.

이렇듯 그는 정말 열심히 그리고 끊임없이 노력하고 연구한 사람으로, 우리나라의 한 모범을 보인 사람으로 많은 사람들의 기억에 남아있다. 유타대학에서 물리학 박사를 받았으며 서울대 교수와 과기처 장관을 지낸 권숙일 박사는 “대한민국에서 그 나이에 이르기까지 그렇게 열심히 연구를 한 분은 아마 없을 것이다.”라는 말로 과학자의 길을 간 이태규 박사를 평했다. 그는 1973년 한국과학원의 석좌교수로 귀국하였을 때 이미 고희(70세)를 넘긴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후학 양성과 연구를 계속해 귀국 후 돌아가실 때까지 20년 간 70편에 가까운 논문을 발표했다고 한다.

박사는 개인의 불행을, 또한 시대적인 모든 어려움을 넘고 이겨냈다. 그는 나라 잃은 식민 백성으로서 우리나라를 빼앗고 짓밟은 일본에서 당당히 그들이 인정하는 박사학위를 따 내었고, 우리나라를 폐허로 만든 6∙25 전쟁으로 가족들의 생사를 알 방도가 없던 상황에서도 꿋꿋이 자신의 연구를 해내어 화학계를 뒤흔들었다. 또한 그는 정치적인 격랑에 휘둘릴 뻔 했을 때에도 중심을 잃지 않았다. 죽는 날까지 연구실을 지켜 내었고, 그 속에서 절망을 딛고 일어나 인내심을 갖고 달려 그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던 것들을 해내고, 쟁취해내어 종래에는 국내 과학자 가운데 최초로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되어 ‘대한민국 과학기술인 유공자’로 오래도록 기억될 것이다.


 

국태영 학생기자 | Chemistry & Biology | 지식더하기


참고자료

[1] https://www.sciencetimes.co.kr

[2] http://scent.kisti.re.kr

[3] https://n.news.naver.com

[4] 박성래. “한국 화학의 선구자 이태규”. 과학과 기술, vol.2004, no.1, 2004, 89-91

[5] https://etnews.com

첨부 이미지 출처

[1] https://koreascientists.kr

[2] 1931년 7월 20일자, 동아일보

[3] The science tim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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